그냥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 - '이라는 이름의 책은
바다의 색이라 그런 것일까.
아니, 더 어둡고 깊은 파란색이라 그런 걸까.
표지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느껴진다.
더욱이 표지의 창백한 색은
제목에 더 눈길을 가게 만들었다.
음..
휴양지의 푸른 바다는 아니다.
여러 상을 받았다는 작은 홍보문구를 지나쳐
글을 읽다 보니 놀랍게도,
저자는 당뇨에 대해서 언급을 한다.
당뇨의 원인.
우리가 인슐린을 생성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그는 당뇨에 대해서
개인의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원인이 있다고 말한다.
당뇨의 원인은 정확히는 알 수 없다고 한다.
기름지고 폭력적인 식사를 하는 서구적인 식습관 때문일 수도 있고,
앉아서 일하는 시간이 늘어났기 때문 일 수도 있다.
아니면 노화, 스트레스나 유전적인 이유로 당뇨가 생긴다고 말한다.
이건 그냥 나 혼자 떠드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형병원에 쓰여있는 글이다.
그래서 우리 당뇨인들은 당뇨를 선고받게 되면
'모든 건 내 책임이구나'라고 한탄하곤 한다.
'내 식습관이 문제였구나'
'내 가족의 유전자, 환경이 이상하구나'
'내가 운동을 안 해서 그런 거구나'
'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생긴 거구나'
라고 말이다.
뭐, 내가 걸린 병을 누구에게 탓할 것인가.
탓한다는 자체가 현실을 외면하는 게 아닌가.
현대 문명을 이룩한 과학적 근거를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답답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을 인정하고
다시 앞으로 걸어가는 일뿐이다.
하지만,
상상조차 했을까?
당뇨의 원인이 다른 곳에 있을 수 도 있다는 사실을.
물론, 흔히 말하는 당뇨의 원인들이 틀린 말은 아니다.
오히려 정확하다.
수많은 연구자들은 당뇨의 원인을 개인에서 찾았다.
'당뇨에 걸린 사람은 다른 사람과 무엇이 다른가?'
이 질문부터 시작된 연구는 많은 지식과 원인을 찾아냈고,
당뇨인이 건강해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아냈다.
너무나도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다.
덕분에 수많은 당뇨인들이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으니깐 말이다.
그럼, 질문이 든다.
저자는 왜 사회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할까?
과학적인 연구결과를 부정하고 사회에게 책임을 묻는 것일까?
그저 당뇨라는 울분을 남에게 해소하라는 건가?
절대 아니다.
저자는 역학자로서
도출된 결과에 조용히 한 걸음 더 들어갈 뿐이다.
의사가 인체의 원인을 탐구할 때, 역학자인 저자는 인간에게서 원인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 생각과 관점을 우리에게 따뜻하게 알려주고 있다.
'왜 이 사람들은 당뇨에 취약한 것일까?'
'몸에 새겨진 사회환경, 절약 형질 가설'
(중략)
즉, 태아기의 영양 결핍이 성인 만성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절약 형질 가설 (Thrifty Phenotype Hypothesis)'이라고 부릅니다.
혹은 이 분야에 학문적으로 큰 기여를 한 데이비드 바커 (David Barker) 박사의 이름을 따 '바커 가설 (Barker's Hypothesis)' 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가설에 따르면, 태아기의 영양 결핍이 성인기 당뇨병 발생의 원인이 되는 것은 태아 입장에서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
- 아픔이 길이 되려면, 김승섭, 책 43p 마지막 단락 ~ 44p 첫 단락-
제2차 세계대전이었던 1944년, 연합군이 네덜란드 남부지역을 점령한 뒤에 이야기다.
노르망디에서부터 진격한 연합군은 라인강 앞에서 발을 멈추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독일군의 저항에 도저히 나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네덜란드를 통해서 라인강을 진출하려 했던,
'마켓 가든' 작전이 실패하면서
연합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1주일 만에 후퇴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앤트워프 항구가 셸튼 전투로 사용이 불가능하게 되자,
보급품 공급에 문제가 생겼다.
식량, 탄약, 연료가 부족한 연합군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저 그 자리를 사수하는 것만이 전부였다.
당시 런던에 있던 네덜란드 임시정부는
독일군이 전략물자를 나르기 위해서 네덜란드와 독일을 잇는 철도를 만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곳에는 네덜란드 시민들이 철도를 만들고 있었고,
이들이 일을 그만둔다면 독일군에게 큰 타격을 줄 것이라 판단했다.
이러한 판단으로 네덜란드 임시정부는 철도 노동자들에게 파업을 해달라고 호소했다.
노동자들은 두려웠지만 이에 응했고, 곧바로 모든 공사를 중단시켰다.
이 용기 있는 결단은 나치군에게 유효타를 먹였고, 이에 분노한 나치군은 곧바로 피의 보복에 들어갔다.
해당 구역을 둘러싸고, 그 지역으로 향하는 모든 식량과 물자를 통제했고, 네덜란드 시민들을 철저히 고립시켜버렸다.
네덜란드 시민들에 대한 나치의 폭력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시민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결국,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한 네덜란드 시민은 굶주림으로 2만 명이 아사했다.
평균 1800kcal를 섭취했던 사람들은 하루 평균 800kcal 미만으로 살아야 했다.
하루 세끼 먹던 사람들이
하루에 한 끼의 식사로 살기에는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고,
더욱이 슬픈 일은 그들에게 12월의 겨울이 찾아왔다.
'네덜란드 기근'이라고 기록된 이 사건은
1944년 10월부터 6개월 동안에 고통받았던 네덜란드 시민들의 삶을 처절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중에서는 임산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대학에 테사 로저 봄 박사는 연구를 진행했다.
'이런 역사적인 비극이 인간의 건강에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줄까?'
'영양 결핍을 겪은 임산부의 태아는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전쟁이라는 불행한 사건으로 인해서
인류는 인위적으로는 알 수 없었던, 새로운 탐구를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로저 봄 박사는
암스테르담의 빌헬미나 하스타 위스 병원에서 태어난 2414명을 대상으로 연구를 시작했고,
1945초 네덜란드 기근 시기에 어머니의 배 속에 있던 태아는 어른이 되었을 때,
다양한 성인병에 걸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연구 결과, 심장병에 걸릴 위험이 3배 높았고 조현증에 걸릴 위험이 2.6배 높았으며
당뇨병에 걸릴 위험도 유의하게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사건 만이 아니다.
독일군에 포위되어 60만 명이 아사한 레닌그라드 지역 주민들에게서도,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으로 4000만 명이 굶어 죽은 중국인들에게서도
비슷한 연구결과가 밝혀졌다.
태아시기의 환경이 성인기 질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관점은,
병에 대한 역학자의 관점은,
이러한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서 더욱이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관점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이 바로 앞부분에서 언급한 데이비드 바커 박사다.
임산부가 기근이나 전쟁으로 충분한 영양공급을 받지 못하는 환경에 놓였다면,
태아는 생존을 위해서 선택을 해야 한다.
척박한 환경에서 태아는 어쩔 수 없이
한정된 영양분을 생존에 필수적인 장기에 먼저 투입하고,
그나마 생존에 도움이 안 되는 췌장 같은 기관에는 에너지를 적게 투입한다.
그로 인해 성인이 되어 병에 걸린다고 하더라도, 태아에게는 최선의 선택일 것이다.
살기 위해서 신체의 일부분을 절단하는 것처럼 말이다.
TMI : 오드리 헵번도 어린 시기를 네덜란드에서 보냈다.
그리고 '피의 겨울'을 이겨내고, 인간으로서 큰 성공을 얻었다.
하지만 훗날 그녀도 빈혈, 호흡기 질환 등 여러 병을 앓다가 부종까지 앓게 되었다.
그리고 63세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생각해봤다.
'어쩌면, 대한민국에서 당뇨가 증가했던 이유는 이러한 사회적인 이유가 있지 않을까?'
'나의 아버지가 당뇨에 걸린 이유는 할머니의 영양결핍이 아니었을까?'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일제강점기부터 6.25 전쟁까지 사람들은 잘 먹지 못했다.
산업화 시대에 들어와 공장을 다니던 시절에도 많은 사람들이 가난하게 살았다.
나의 어머니는 진주 출신이신데,
아버지가 없어서 늘 힘들게 살았다고 한다.
주변의 이웃들도 넉넉지 못한 형편이라 도와주지 못했고,
늘 배고프게 사셨다.
임자 있는 산에 가서 몰래 땔감을 주워오고, 산 주인에게 걸리는 날에는 몰매를 맞았다.
12살에 어머니는 논에 물을 대기 위해서
발 밑도 안 보이는 어두운 밤에
남동생이랑 손을 잡고 논두렁을 지키고 있어야 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을 때는
낮에는 공장에 들어가 일하고, 야간에는 학교에 등교해 공부하셨다.
나의 할머니는 삶이 고달파, 어머니를 버리려고 여러 번 시도하셨다.
나의 어머니는
어디 하나 의지 할 곳 없이
동생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버티셨다.
그리고 이런 가난한 삶이 흔치 않은 대한민국의 삶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만약, 바커 박사가 그때의 대한민국을 바라본다면 어떤 연구결과를 보여줬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머릿속에서 이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당뇨병은 개인의 책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 '절약 형질 가설'은
어쩌면
미궁에 빠진 대한민국의 성인병 증가의 정답을 될 수도 있다.
마치며.
정보를 쉽게 얻기 힘든 시기에는
당뇨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이 떠돌아다녔다.
당뇨가 풍족함 속에서 등장한 성인병이라든지,
신께서 부자를 벌하는 질병이라든지 말이다.
요즘에는 게으름, 식욕을 절제하지 못한 비만병이라고 비꼬는 인간들도 더러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나에게 말한다.
당뇨는 우리가 가난 속에 살았다는 증거이자,
그 인고의 시간을 이겨낸 지쳐버린 인간의 상처 많은 훈장이라고.
그렇게
이 책은 나의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참고자료)
1. 아픔이 길이 되려면 - 김승섭 지음.
2. 위키피디아 - 네덜란드 기근, 셸튼 전투.
3. SBS 다큐 스페셜 - 생명의 선택
'건강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단의 비술, 덴마크 다이어트 식단 (0) | 2022.08.26 |
---|---|
치매와 당뇨. 그 위험한 동거 (0) | 2021.11.13 |
혈당잴때 피짜면 안된다. ・・・ 올바른 혈당측정 방법은 (0) | 2021.11.11 |
당뇨와 스트레스 (0) | 2021.10.15 |
당뇨인의 하루 식사량 계산방법 (0) | 2021.09.16 |
댓글